2018년01월18일 (Thu)   Home   탑뉴스   정치   자치행정   경제   사회   문화   연예   스포츠   오피니언   지역뉴스   특집   사람들   

칼럼
사설
기자수첩
독자투고
특집
연재특집
기획취재
사람들
포토뉴스

회사소개
기사제보
게시판
광고문의
정기구독
E-mail문의
독자위원회
고충처리인
청소년보호정책

지역 날씨정보

뉴스 홈 > 기획취재

특집 연재특집 기획취재
윤선도의‘고산유고’ 집필지 광양 추동마을[고산 윤선도 선생의 광양 유배지를 찾아서] 2008년02월14일(Thu)
1665년 79세 나이로 유배 ‘귀향살이’
500년 소나무만 말없이 지키고 있어
 [고산 윤선도 선생 나이 79세 때인 1665년에 광양고을 추동마을로 유배되어 2년4개월동안 귀향살이를 했다. 그가 남긴 문집 <고산유고>를 이 곳에서 지었다고 전해 지고 있다. 역사적인 자료는 많지 않으나 그 현장을 그림과 함께 찾아본다.]


 정철·박인로와 더불어 조선 3대 시가인(詩歌人)의 한 사람으로, 서인(西人) 송시열에게 정치적으로 패해 유배생활을 했다. 자는 약이(約而), 호는 고산(孤山)·해옹(海翁). 부정공(副正公) 유심(唯深)의 둘째 아들이었는데, 8세 때 백부인 관찰공(觀察公) 유기(唯幾)의 양자로 가서 해남 윤씨의 대종(大宗)을 이었다.

11세부터 절에 들어가 학문연구에 몰두하여 26세 때 진사에 급제했다. 1616년(광해군 8) 이이첨의 난정(亂政)과 박승종·유희분의 망군(忘君)의 죄를 탄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유배를 당해, 경원(慶源)·기장(機張) 등지에서 유배생활을 하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 풀려났다.

고향인 해남에서 조용히 지내던 중 1628년(인조 6) 봉림(鳳林)·인평(麟坪) 두 대군의 사부가 되면서 인조의 신임을 얻어 호조좌랑에서부터 세자시강원문학(世子侍講院文學)에 이르기까지 주요요직을 맡았다. 그러나 조정 내 노론파의 질시가 심해져 1635년 고향에 돌아와 은거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가복(家僕) 수백 명을 배에 태워 강화로 떠났으나, 이미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남한산성을 향해 가다가 이번에는 환도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세상을 등질 결심을 하고 뱃머리를 돌려 제주도로 향해 가던 중 보길도의 경치를 보고 반해 부용동(芙蓉洞)이라 이름하고 여생을 마칠 곳으로 삼았다.

1638년 인조의 부름에 응하지 않은 죄로 영덕(盈德)으로 유배를 당해 다음해 풀려났다. 보길도로 돌아와 정자를 짓고 시(詩)·가(歌)·무(舞)를 즐기며 살았으며, 효종이 즉위한 이래 여러 차례 부름이 있었으나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무민거(無憫居)·정성당(靜成堂) 등 집을 짓고, 정자를 증축하며, 큰 못을 파는 등 호화로운 생활을 즐기면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1659년 효종이 승하하자 산릉(山陵)문제와 조대비복제(趙大妃服制)문제가 대두되었다. 남인파인 윤선도는 송시열·송준길 등 노론파에 맞서 상소로써 항쟁했으나 과격하다고 하여 삼수(三水)로 유배를 당했다.
윤선도나이 79세 때에는 1665년에 광양고을 추동마을로 유배되어 와서 2년4개월동안 귀향살이를 하였는데 윤선도가 남긴 문집 <고산유고>를 이 곳 에서 지었다고 전해 지고 있다. 그가 살았던 옛 집터와 울창한 대나무 숲과 물이흐르는 개울과 암반 4~5백년 되는 노송이 있다.

1667년(현종 9) 그의 나이 81세에 이르러 겨우 석방된 뒤 여생을 한적히 보내다가 1671년(현종 12) 낙서재(樂書齋)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는 성품이 강직하고 시비를 가림에 타협이 없어 자주 유배를 당했다.

한편 그는 음악을 좋아하는 풍류인이기도 했다. 특히 그가 남긴 시조 75수는 국문학사상 시조의 최고봉이라 일컬어진다. 그의 시문집으로는 정조 15년에 왕의 특명으로 발간된 <고산유고>가 있다. 이 시문집의 하별집(下別集)에 시조 및 단가 75수가 <산중신곡 山中新曲> 18수, <산중속신곡 山中續新曲> 2수, 기타 6수, <어부사시사 漁父四時詞> 40수, <몽천요 夢天謠> 5수, <우후요 雨後謠> 1수 순서로 실려 전한다.

<산중신곡> 18수 가운데 <오우가 五友歌>는 물·돌·소나무·대나무·달을 읊은 시조로 널리 애송되었다. <어부사시사>는 효종 때 부용동에 들어가 은거할 무렵에 지은 것으로, 봄·여름·가을·겨울을 각각 10수씩 읊었다. 그의 시조는 시조의 일반적 주제인 자연과의 화합을 주제로 담았다. 우리말을 쉽고 간소하며 자연스럽게 구사하여 한국어의 예술적 가치를 발현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숙종 때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헌(忠憲)이다.

△ 세연정
사계절 어촌의 풍경과 어부의 생활을 읊은 고산 윤선도의 어부사시사는 조선시대 시가문학의 백미로 꼽힌다. 춘하추동에 따라 10수씩, 총 40수로 되어 있다. 전남 완도군 보길도는 어부사시사의 산실. 고산은 1637년 세상을 등지고 은둔 생활을 위해 제주도로 향하던 중 이곳의 자연 경관에 매료돼 13년을 지냈다. 섬에는 고산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그가 연회를 즐겼던 세연정과 세연지, 시문을 창작하고 강론한 낙서재, 사색의 터전이었던 동천석실 등이 그것이다.

 △ 녹우당
 해남 윤씨의 종가이다. 윤선도의 4대 조부인 효정(호는 어초은漁樵隱 1476~1543)이 연동(蓮洞)에 살터를 정하면서 지은 15세기 중엽의 건물이다. 사랑채는 효종이 스승인 윤선도에게 하사했던 경기도 수원집을 해상 운송하여 이곳에 이전하여 녹우당이란 이름을 붙였다. 은행나무가 녹우당을 상징하고 뒷산에는 오백여 년 된 비자나무숲(천년 기념물 제 241호 )이 우거져 있다.
 
△ 광양추동 유배지
윤선도나이 79세 때인 1665년에 광양고을 추동마을로 유배되어 와서 2년4개월동안 귀향살이를 하였는데 윤선도가 남긴 문집 <고산유고>를 이 곳에서 지었다고 전해 지고 있다. 그가 살았던 옛 집터와 울창한 대나무 숲과 물이흐르는 개울과 암반 4~5백년 되는 노송이 있다.             <자료정리=전만오 기자>

[기획취재=신윤식 기자]

돌아가기    리스트 보기   출력하기

낭만도시 여수의 야경

이 슈
제6회 대한민국...

한국전통예술의 등용문인 '제6회 대한민국 전통예술 대 경연'에서 판...

산림치유지도사...

산림청(청장 김재현)은 2018년부터 치유의 숲 등 17개 산림복지시설...

구별하기 어려...

산림청 국립수목원(원장 이유미)은 가을철 독버섯 중독 사고가 종종 ...

나주시 ‘제 3...

나주시 대표축제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제 3회 마한문화축제가 오는 9...

영암 氣찬랜드...

자연계곡형 피서지로 유명한 월출산 기찬랜드에서 오는 7월 22일부터...

연재특집
대한민국 말산업 미래 이끌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