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소업체를 운영하는 A씨의 명함은 두겹이다. 써야 할 ‘사회적 직함’이 너무 많아서이다. 지역 경찰서나 청소년관련 자문위원부터 제법 굵직한 기관의 자문위원까지 줄잡아 10가지는 된다. 유력인사인 B씨도 꽤 여러 곳의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명함은 간단하다. 무슨무슨 기관의 자문위원이라는 것이 그에겐 그다지 내세울 것이 못되기 때문이다.
A씨는 자문위원임을 퍽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사회적 신분이 필요한 자신의 욕구를 어느 정도 채워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원금을 내는 등 나름대로 열심히 활동하면서 더러는 그 직을 이용하기도 한다. B씨는 A씨와는 달리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상대의 필요에 의해 자문위원직을 수락했다. 모임에 참석하면 거마비를 받지만 그야말로 촌지여서 굳이 얽매이지 않는다. 그래도 그가 자문위원을 마다하지 않는 이유는 자문위원단의 면면이 알아둬서 손해 볼 일이 없기 때문이다.
자문은 어떤 일을 바르게 처리하려고 전문가에게 의견을 구하는 것이고 자문위원은 그 일을 하는 사람이다. 심의권이나 의결권이 없으므로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다. 그런데도 이익집단들이 자문위원단을 구성하는 것은 평소 교제를 바탕으로 일이 터졌을 때 덕을 보려는 숨은 마음이 있어서이다. 그것이 바로 전문가 그룹으로 자문위원단을 구성하지 않고 사회 각 계층의 실력자들을 총망라하는 이유이다.
수십만명의 서민을 울리고 있는 제이유그룹의 자문위원단이 문제가 되고 있다.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일종의 다단계 업체인데도 명망가들이 대거 포진해있다. 이들은 사건이 터지자 한결같이 “나도 피해자”라거나 “잘 모르겠다. 그저 이름만 얹었을 뿐”이라고 말하지만 그 자체가 이미 책 잡힐 일임을 모르지는 않았을 터.
제이유의 환상마케팅에 긴가민가 했던 피해자들은 제이유가 내놓은 전직 장관과 판사, 군장성, 교수, 언론인, 탤런트, 가수 등의 면면을 보면서 확신을 가졌다고 한다. ‘얼굴마담’이 되어 사기의 ‘미끼’가 된 제이유의 이름깨나 알려진 자문위원들. 과연 몰랐다고 해서 죄가 없는 것일까.
제이유 그룹이 2천억원의 비자금을 조성한 뒤 그중 1백억원을 정·관계에 뿌렸다는 국가정보원의 보고서가 지난 5월 정치권에 공개됐을 때만 하더라도 많은 사람들은 ‘설마’ 했다.
제이유 그룹이 “터무니없는 음해”라고 워낙 강력하게 부인한 데다 노무현 정권 출범 이후 발생한 유전 의혹사건이나 행담도 의혹 사건 등에서 몇몇 고위관료들의 부적절한 개입이나 권한 남용의 사례는 있었지만 거액의 돈과 막대한 이권이 교환되는 권력형 비리와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부장검사 출신인 이재순 청와대 사정비서관의 가족이 제이유 그룹과 10억원이 넘는 돈거래를 했다는 사실이 밝혀진 데다 경찰 최고위급 인사라고 할 수 있는 박영진 정보국장(치안감 급)도 제이유측과 5천만원의 돈거래를 한 사실이 확인됐다고 한다. 또 정승호 동해경찰서장은 5천만원을 받은 혐의로 이미 구속됐다. 또다른 경찰 간부와 법조인 정치인 인사 등이 용의선상에 올라 검찰 조사를 받고 있다는 소식이다. ‘소문’의 실체가 한꺼풀씩 벗겨지면서 점차 ‘대형 게이트’로 발전할 조짐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검찰은 ‘제이유 게이트’와 관련한 국민적 의혹을 해소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수사 대상자들이 모두 청와대 비서관이나 전·현직 검·경 간부, 법조인, 정치인들인 만큼 갖가지 방법을 통해 외압을 행사하거나 수사를 방해할 개연성이 큰 만큼 더욱 엄정하고 성역 없는 수사로 이번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규명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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