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기업의 물갈이 인사가 시작됐다. 정부는 최근 산하 공공기관 및 기관장의 지난 1년간 성적표인 경영실적 평가결과를 공개했다.
평가대상 96명 기관장의 운명이 걸린 ‘살생부’다. 청와대는 이를 토대로 후임 인선에 착수했다. 그러나 인사 관행을 볼 때 향후 인선도 기대보다 우려가 큰 게 현실이다. 청와대가 뒤늦게 낙하산 인사에 브레이크를 걸긴 했지만 크게 달라질 게 있을지 의문이다.
박근혜 대통령 스스로 ‘국정철학 공유’를 인선의 주된 잣대로 제시한 이상 낙하산 및 정실 인사 논란이 재연될 소지가 크다. 만성적인 공기업 부채는 나라 살림살이를 위협할 정도로 심각하다. 새 정부가 관치의 망령을 떨치지 못하는 한 공기업 부실에 따른 국민 부담만 가중될 우려가 크다.
이번 평가는 공공기관 인사와 맞물려 있다. 기관 평가에서는 에너지 공기업이 낙제점을 받은 게 특징이다. 최근 잇단 원전 사고의 진원지인 한국수력원자력과 방사성폐기물관리공단이 D등급을 받았다. 이명박 정부 자원외교의 선봉장 역할을 한 한국광물자원공사와 석유공사, 석탄공사도 최하위인 E등급으로 나왔다.
기관장 평가도 크게 다르지 않다. 원자력안전기술원장과 석탄공사 사장은 E등급을 받아 교체대상으로 분류됐다. 한수원과 에너지관리공단, 방송통신전파진흥원, 한국국제협력단, 한국투자공사 사장도 D등급을 받아 자리보전이 여의치 않다.
최근 감사원 감사에서도 방만한 공기업 경영이 문제가 됐다. 이번 공공기관 평가와 비슷한 결과다. 해외자원 개발사업에 21조원을 투자했다가 부실만 키운 석유공사, 광물자원공사, 가스공사가 대표적이다. 이들 공기업 사장은 대부분 이명박 정권의 보은 인사 덕에 자리를 꿰찬 뒤 무리한 국책사업을 주도하다 빚더미만 남겼다. 낙하산 인사의 부작용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금융계에 이어 다른 분야에서도 낙하산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인천국제공항 사장에 정창수 전 국토해양부 1차관이, LH(한국토지주택공사) 사장에 이재영 전 국토해양부 주택토지실장이 임명됐고, 에너지관리공단 이사장에는 변종립 전 산업통상자원부 지역경제정책관이 결정됐다.
한 재계 인사는 “낙하산 인사를 하지 않겠다는 박 대통령의 뜻에 따라 청와대가 대통령선거 캠프 출신을 내려보내지 않자 무주공산인 자리를 관료들이 독차지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청와대가 인사에 제동을 건 것은 시의적절하다. 인선이 한두 달 늦어지더라도 관료들이 요직을 싹쓸이하는 것은 막아야 한다. 능력 있는 관료를 배제해서도 안 되겠지만 관료 일색은 곤란하다. 공정하고 투명한 인선을 통해 능력 있는 인재를 고루 등용하는 풍토를 만들어야 한다. 그동안 유명무실하다는 평가를 받아온 인사추천위원회나 공모 절차도 제구실을 하도록 정비할 필요가 있다.
낙하산 인사를 단칼에 없애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고 낙하산을 솎아낸 자리에 또 다른 낙하산을 내려보내는 악순환을 되풀이할 수는 없다. 이번 공공기관장 인선이 긍정적 평가를 받는다면 공정한 인사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좋은 모델이 될 것이다.
결국 다른 누구가 아니라 청와대가 결단해야 할 문제다. 청와대가 국가 정책의 큰 줄기를 맡고 있는 대형 공공 기관의 사장 인선까지 간여하지 말라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다. 그러나 나머지에 대해선 각 공공 기관 인사추천위가 실질적 권한을 갖고 유능한 경영인을 찾아내면 청와대는 그 후보의 하자 여부만 검증하는 식으로 시스템을 운영할 필요가 있다.
청와대는 공공기관장 인선을 재검토하겠다고 밝혔다. ‘관치’ ‘낙하산’ 논란을 의식해 인재 풀을 확대하겠다는 취지다. 하지만 논란이 불식될지는 미지수다.
국정철학 공유라는 원칙에 집착하는 한 관치와 낙하산 논란을 피하기 어렵다. 공정한 인선은 공공기관의 자율성을 보장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대선 논공행상과 관치의 유혹을 떨치지 못하는 한 공기업 부실 해결은 요원한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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