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중부지역을 강타한 슈퍼 태풍 하이옌(Haiyan)은 거칠고 잔인했다. 하루 사이에 공항 도로 항구 같은 삶과 문명의 흔적을 거의 깡그리 지워버렸다. 무너진 가옥들의 잔해와 뿌리 뽑힌 수림들이 뒤죽박죽이 된 도시는 사람이 살 수 없는 아수라장이 됐다.
폐허 속에 시민들이 흩어져 있고 거리에는 가족 잃은 사람들의 울음 소리와 절망만이 가득하다.
우리나라에서 비행기로 4시간 거리 밖에 안되는 동남아의 우방 필리핀은 지금 초강력 태풍 하이옌으로 인한 사상 초유의 대재앙을 당해 신음하고 있다. 1만2천여명이 사망·실종되고 수십만명의 이재민이 발생한 것이다.
본 필리핀은 6.25전쟁때에 7천420명을 파병했고, 한국으로 시집온 여성은 1만5천명이나 된다고 한다. 필리핀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다섯번째로 국교를 맺은 나라다.
미국·영국·프랑스·대만에 이어 1949년 3월 정식 수교를 했다. 필리핀은 수교를 한지 1년여 뒤인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유엔군의 일원으로 참전했다.
총 5개 보병 대대 7천420명이 한국으로 건너와 경기도 연천 철의 삼각지대 율동전투와 아스날고지 전투 등에서 중공군과 전투를 벌였다. 112명이 전사하고 57명이 실종됐으며 299명이 부상을 입었다.
필리핀의 라모스 전 대통령은 한국전에 소대장으로 참전했고, 현 아키노 대통령의 아버지인 베니그노 니노이 아키노 전 상원의원도 마닐라 타임스 기자로 종군했다.
필리핀은 한국전 이후에도 1970년대까지 한국을 경제적으로 지원하는 나라였다. 1990년대 이후엔 거꾸로 우리나라가 필리핀에 유·무상 원조를 해주고 있다. 필리핀은 또 우리를 ‘사위의 나라’라고 부른다. 우리나라 남성과 결혼한 필리핀 여성이 1만5천명에 달하기 때문이다. 재중 동포 결혼자가 많은 중국, 베트남에 이어 셋째 규모다. 아주 가까운 나라임을 알 수 있다. 우리는 도와줘야 한다.
필리핀과 우리나라는 미국과 동맹국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필리핀은 우리 정부의 대북정책을 일관되게 지지해왔다. 최근에는 최초로 경공격기 수출이 성사단계에 있다. 방산 수출도 커지고 있는 것이다. 필리핀에 대한 우리 수출액은 작년 82억달러, 수입은 33억달러로 우리의 23번째 교역국이다.
지난 12일 오전 우리 한국 외교부에선 조태열 제2차관 주재로 필리핀 태풍 피해 관련 민관 합동 해외긴급구호협의회가 열렸다. 이날 회의에선 필리핀에 500만달러를 긴급 지원하고, 주 필리핀 대사관 직원과 신속대응팀, 119 긴급구조단과 코이카(KOICA) 직원 등 14명을 현지에 보내기로 결정했다.
전날 오후 다자외교조정관 주재로 열린 대책회의 때보다 파견인원이 9명 늘어난 것이다. 하지만 전 국토가 비탄에 빠진 혈맹국에 대한 지원치고는 인색하다.
언론과 일반 국민들도 필리핀 태풍 피해에 대해 그다지 관심이 없는 것 같다. 태풍 피해가 발생한지 3일째 돼서야 본격적인 보도가 나왔고, 그나마 관심은 현지 우리 교민의 생사 여부에 집중돼 있다.
미국의 9.11테러나 카트리나 피해,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났을 때에 온종일 생방송을 하거나 모금운동이 일어났던 것과는 대조가 된다.
필리핀을 찾는 한국인은 연간 100만명으로 필리핀의 외국 방문객 중 1위다. 한국 교민은 9만명이 넘고 한류 열풍도 뜨겁다. 아세안(ASEAN) 10개국 중 인구 규모로 인도네시아에 이어 2위이고 한국과 가장 친한 나라다.
만일 이 같은 대재앙이 미국에서 발생했다면 우리 정부와 국민들이 이 같은 태도를 보였을까. 7천900여명이 사망·실종된 미국 카트리나 피해 당시 우리 한국 정부는 총리가 직접 나서서 관계부처 장관 회의와 경제·종교계 초청 간담회를 잇따라 열었다.
우리 언론은 일주일 가까이 카트리나 피해 상황을 생중계 했고, 많은 국민이 TV를 통해 재난 상황을 지켜봤다. 우리는 동맹국인 미국과 필리핀은 다를 수 없다.
따라서 하후하박(何厚何薄)을 해서는 안된다. 고난에 빠진 우방에 대한 인도적 지원과 관심이라는 점에선 다른 기준을 적용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정부는 하루 빨리 보다 적극적인 성의를 보여야 한다. 필리핀은 우리나라의 2대 교역 상대국이기 때문이다.
불가항력적 자연재해 앞에서는 국경이 있을 수 없다. 미국과 호주 등 세계 각국이 인도적 차원에서 필리핀을 돕기위해 팔을 걷고 나섰다. 우리도 하루빨리 모금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 한국과 필리핀은 '피를 나눈 형제국'이기 때문이다.
6.25전쟁때 미국과 영국에 이어 세번째로 지상군을 파견했다. 그때 참전한 7천420명 중 112명이 이 땅에 고귀한 생명을 바쳤다.
가족과 집을 잃고 망연자실한 피해자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일은 인류 전체의 당연한 도덕적 책무다. 자연이 몰고 온 불의의 재앙 앞에서 고통 받고 있는 필리핀이 신속한 복구와 재건을 통해 난관을 이겨내길 기원해 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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