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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후기의 독서풍경 |
2008년01월23일(Wed) |
| 안용호<논설위원, 광주 금당초등학교 교장> |
어렸을 때 할머니는 나를 업어 키우시면서 유충렬전, 홍길동전, 춘향전 등 여러 이야기를 들려 주셨다. 그 때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고 즐거워했던 것이 내가 소설을 가까이 하는 계기가 되었고, 그로부터 나의 독서여행은 시작되었다. 그러면 할머니는 어떻게 그 많은 이야기를 알고 계셨을까?
할머니의 할머니들이 살았던 시대인 17세기부터 20세기 초는 지금 우리들의 생활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주로 농업에 종사하였으며 밭에서 입으로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그리고 그것이 토씨 하나 틀리지 않게 전승되었다.
계급이 존재하는 엄격한 유교의 이념이 살아 있어서 세속 문화가 발달하지도 않았고 접하는 것조차도 어려웠던 시대였으나 서울과 지방의 독서풍경 모습이 사뭇 달랐다.
서울에는 할머니께서 들려주셨던 여러 이야기책을 빌려주는 세책업자가 있었다. 오늘의 만화 가게나 비디오 가게를 연상하면 된다. 이 책들은 고대 이집트에서 노예에 의해 필사되듯이 전문 필사자에 의해 만들어졌다.
정치적 분위기가 음란하고 무익하다는 이유로 소설 읽기를 금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대부 집안의 여성과 궁중의 여성은 소설의 열혈 팬이었다. 듣는 소설에서 읽는 소설로서 확대 발전해 간 것이다.
반면 시골에서는 책을 빌려와 읽어주는 ‘강독사’가 있어 모아놓고 책을 읽어주었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문화를 쉽게 접하기 힘든 지방이라는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물론 우리 할머니는 강독사에 들은 것이 아니라 밭을 매면서 할머니의 할머니로 구전된 것을 우리들에게 들려주신 것으로 판단된다.
세책점이 활기를 띤 18세기 후반의 경우 여성들이 많이 빌려다 본 베스트셀러는 주로 한글로 번역 및 번안된 중국 소설 서유기, 수호전 삼국지 등 이었다.
그런데 1794년 대마도의 역관 오다 이쿠고로오가 쓴 ‘상서기문’에는 구운몽, 최현전, 장박전, 소운전 등 조선에서 창작된 국문 영웅소설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국내 창작 국문 소설도 읽었음을 알 수 있다. 또 대하소설도 필사하여 읽었다. 이런 소설의 유통은 ‘책쾌’에 의해서 더 발전하였다. 책쾌는 책 거간꾼쯤으로 생각하면 된다.
최남선이 향목동 세책점이 없어지기 전에 그 세책점에서 보유하고 있던 세책 목록을 분석해 보니, 대여해 주던 책이 총 120종 3천221책이나 되었다고 한다. 놀라운 것은 185권에 달하는 ‘윤하정삼문취록’이나 117권짜리 ‘명주보월빙’ 등 장편 소설도 포함되었다는 것이다. 조선 후기는 그야말로 소설 천국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그 많던 책들은 어디로 갔을까?
세계 제일인 고려 불화가 250점 가운데서 10점 정도만 우리나라에 있고 나머지는 일본, 미국, 유럽에 있는 것처럼 세책본 고소설은 30% 정도만 국내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고, 70%는 일본의 동양문고, 하버드대 옌칭 도서관, 프랑스의 기메 박물관, 영국의 대영 박물관에 산재되어 있다. 최근 일본 동양문고에서 ‘홍길동전’의 이본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문화재 보호와 세계 유산이라는 의미에서는 오히려 기뻐할 일이다.
조선 후기에는 남녀노소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소설에 탐닉했다. 그러한 현실에 영합해 책을 빌려주고 판매하여 돈을 벌던 책장수들이 판을 치고 있었다. 소설을 향유하며 살아가던 조선후기 우리 조상들의 일상의 풍경은 한 폭의 그림 같다고나 할까? 안방에서 책을 읽으며 키득거리고 강독사가 읽어주는 내용에 웃고 웃는 조상들의 모습이, 금성 라디오를 듣기 위해 이장 집에 모이고 처음 TV가 나왔을 때 보기 위해 부자 집 덕석에 모였던 조상들의 모습과 오버랩 된다.
지금까지 알려진 국내 고소설 작품은 858종에 이른다고 한다. 중국이 1천164종이니 우리 고소설의 수효는 결코 적은 양이 아니다. 소설 선진국이었고 강대국이었다고 할 만하다. 안타까운 것은 오늘날 현존하는 고소설 작품 중 일반인이 알고 있거나 현대어로 읽을 수 있는 작품의 수는 1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한다.
이제 우리 것에 눈을 돌려 세책 고소설에 관심을 갖는 연구자들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라는 것이 위안이 될 뿐이다.[관리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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