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열린 남북 총리회담이 서로의 의견접촉이 순조롭고 그 어느 때보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고무적이다. 남북한은 총리회담 이틀째인 15일 개성공단을 통과하는 경의선 문산~봉동역 구간 화물열차를 12월 11일 개통하기로 합의하고, 또 이달 마지막 주에 제9차 적십자회담을 금강산에서 열고, 다음 달 7일 금강산면회소 준공식을 열기로 했다.
처음 이산가족 상봉이 이뤄졌을 때 우리는 이렇게 가까운 길을 두고 그 긴 세월을 참고 왔는가 흥분하고 울부짖었다. 그만큼 감동적이고 통일을 향해 바짝 다가선 듯한 마음에 들뜨기도 했다. 하지만 이산가족 상봉이 정례화되고 잦을수록 우리는 보다 많은 것을 기대했고 현실화되기를 원했다. 이제 우리에게는 지구상에 하나 뿐인 분단국(分斷國)으로서 민족의 염원인 통일을 이룩해야 된다는 이번 회담이 이를 최촉(催促)하는 밑거름이 돼야함을 양쪽대표는 깊이 인식해야 한다.
총리회담의 중요 의제인 조선협력단지, 철도, 도로, 보건의료 등이 따지고 보면 통일을 위한 준비단계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은 통일이 되면 가장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될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조성을 논의한다면서 북의 서해 북방한계선(NLL) 무력화(無力化) 주장을 물리칠 군(軍) 당국자는 대표단에서 빼 버린 것도 이해할 수 없다. 정부는 포함시키려 했으나 북한이 반대해 포기했다고 한다. 회담도 하기 전에 북한에 밀린셈이 아닌가 싶다.
이재정 통일부 장관은 “군사 분야는 27일부터 열리는 남북 국방장관회담에서 논의될 수 있다”고 했지만 상식적으로 납득되지 않는다. 국방장관회담은 총리회담의 하위(下位) 회담이다. 하위 회담을 먼저 열어 상위(上位) 회담으로 연결하는 게 상식이다.
더구나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를 설치하려면 공동어로구역과 평화수역 설정, 한강하구 공동이용 등 군이 관련된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경협만 약속했다가 국방장관회담에서 북한이 딴소리를 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는 언어도단(言語道斷)이라고 여겨진다.
이번 회담이 열린 곳은 워커힐호텔이다. 16년 전인 1991년 12월 5차 남북 고위급회담이 열렸던 장소다. 하지만 논의 내용은 16년 전에 비해 오히려 후퇴했다는 지적이 나왔다.
당시 정원식 국무총리는 기조연설에서 “민족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는 심각한 불안의 근원은 북한 측이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는 사실에서 비롯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최고위급 상설회담인 이번 총리회담에서 정부는 경제 협력에 치중하는 바람에 북한 핵문제와 관련해 ‘핵’자도 꺼내지 못했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 북한으로부터 남북 경협 확대를 위한 전제조건인 긴장완화 조치를 얻어 내지 못한 채 또 퍼 주기만 하는 회담이 되면 국민은 물론이고 차기 정부의 지지도 받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럼 북한 핵문제는 어떠한가? 10년 넘게 한반도를 짓누르고 있다. 북한은 핵무기 개발이 주권국가의 정당한 권리이며 미국의 공격위협에 맞서기 위한 자위책이라고 주장, 핵개발을 추진해 왔다. 그런가 하면 미국이 북한에 대한 위협을 철회하면 핵무기는 필요 없을 것이라며 양면전략도 쓰고 있다. 이에 대해 미국은 강대국 이외의 핵 보유를 금지하는 핵확산금지조약을 내세우며 북한을 압박하고 있다.
94년 1차 북한 핵위기 때는 북한과 미국의 양자협상구도로 문제해결을 시도했다. 2차 핵위기 때는 동북아 6국이 참가하는 다자간 협상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지루하고 위험한 줄다리기 끝에 북한의 핵포기라는 원칙에 합의하는 데 성공했다.
이제 북핵 폐기의 최종 결정권자는 바로 김정일 위원장이다. 따라서 김 위원장은 반드시 한반도 비핵화선언을 지켜야 한다. 또 평양에 있는 남측 기업들에 대한 통행·통신·통관의 3통(通)을 확답해야 한다. 이 문제가 제기된 지 벌써 십수 년이 된 까닭이다. 진정한 개방, 개혁에 대한 거부로 비친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실천과 신뢰의 문제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남북 관계가 진정으로 본궤도에 오르려면 신뢰와 실천이 선(善)순환해야 한다. 실천되지 않는 합의는 결국 불신의 골만 깊게 할 뿐이다.
병(兵)·식(食))·신(信) 3가지 중에서 한가지를 버려야 한다면 병을 버려야 한다고 공자(孔子)는 말했다. 그 다음 또 하나를 버린다면 식이라고 했다. 오직 남은 것은 신이다.
남북은 이번 총리회담을 마치면서 무려 49개항의 합의를 했다. 이 합의 사항에 대해 남북은 서로 신을 지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거짓과 반목과 배반이 있게 되기 때문이다. 우선 남북은 서로 믿는 풍토를 조성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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