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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죄추정의 원칙과 구속영장 |
2007년09월30일(Sun) |
| 이승배<논설위원> |
변양균 전 청와대 정책실장과 신정아 전 동국대 교수 사건이 검찰의 수사 끝에 실체가 드러나는 듯하다. 사건의 내막은 신 전 교수의 예일대 졸업 학력이 허위라는 것과, 본인이 이를 감추기 위해 전방위 로비를 벌였다는 것이다. 고위 공직자이던 변 전 실장과는 부적절한 관계를 맺음과 동시에, 그의 약점을 잡아 교묘하게 이용했는가 하면, 이런 커넥션을 통해 동국대 재단 이사장인 영배스님에게 정부예산 지원을 받게 함으로써 동국대 교수임용과정에서 자신의 학력위조를 숨기려 했다는 것이다.
변 전 실장은 신씨를 위해 일부 사찰과 미술관에 부당한 특혜가 돌아가도록 압력을 행사했고, 그 결과 그의 ‘바른 공직생활 30년’ 인생이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두 사람의 복잡한 관계만큼이나 실타래처럼 얽힌 거짓말의 향연을 보는 듯하다.
이번 사건을 지켜보며 짚고 넘어가야 할 몇 가지 관전 포인트를 소개할까 한다.
1. 여전히 정치권 눈치보는 검찰
이번 사건 수사과정을 지켜보면, 초기 검찰의 수사 의지가 약했거나, 급히 봉합하려한 정황이 엿 보였다. 의혹 제기 44일만에 수사 개시했고, 구속영장 청구시에도 신씨의 학력위조 관련 혐의만 법원에 제시했다. 올해 말 대선이 예정되어 있고, 야당후보가 압도적인 지지율로 선두를 달리는 반면, 범여권 신당 경선 흥행이 실패할 우려가 있자, 검찰로써는 추석 이전에 사건을 조기 종결하고 싶어 하는 정치권 윗선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과거 정치권에 휘둘려 스스로 이름을 더럽히던 검찰이 또 다시 정치권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안타깝다. 검찰총장이 대통령에 의해 임명된다고 하지만, 수사권까지 대통령을 비롯한 고위직의 전유물인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대검중수부 검사와 수사관을 뒤늦게 보강하기 보다는, 초기 대응을 제대로 했다면 보다 적은 노력과 시간으로 사건의 실체에 접근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2. 검찰만 구속수사 원칙인가?
또 하나 주목할 것은, 검찰의 신정아씨에 대한 구속영장을 법원이 기각한 일이다.
우리나라 형사소송법은 불구속 수사 원칙을 기본으로 한다. 하지만, 그간 검찰의 수사 형태를 볼때, ‘구속수사’가 원칙이 아니었나 착각이 들정도로 구속영장 청구는 빈발했다.
하지만, 인권에 대한 사법부의 의식향상과 얼마전 론스타 경영진에 대한 구속영장 기각사건에서 봤듯이 이번 영장기각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오히려 구속영장 제도를 이용해 수사를 쉽게 하려는 검찰의 관행을 법원에서 경고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원래 구속영장 제도는 ‘증거인멸의 우려가 있거나, 도주 우려가 있을 때’ 법원이 검찰의 청구에 의해 허가하는 명령장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오래 전부터 ‘징벌적 의미’로 변질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사회적 논란을 일으키는 사건의 경우, 일단 구속영장을 발부 받아 피의자를 구치소에 가둬 두고, 초췌한 모습으로 검찰청 현관에 들어서는 그의 모습을 방송카메라를 통해 노출시키는 수법은 피의자가 이미 죄인이 된 듯한 인상을 국민들에게 심어줄 뿐더러, 무죄로 추정 받는 피의자 가슴에 ‘주홍글씨’를 새겨 버리는 일이 될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사기관의 구속수사를 선호하는 이유는 일단 피의자가 구속될 경우, 심리적으로 위축됨으로써 자기방어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기 때문에 수사에 편리하다는 장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별건수사'등의 편법을 이용한 수사관행이 여태까지 이어져 왔던 것이다.
3. 형량협상(Pleas Bargain) 관행
또한 일부 수사관들은 이런 점을 이용해 ‘형량협상(Pleas Bargain)’을 함으로써 유죄입증에 유리한 진술을 끌어낼 수도 있었다. 과거에는 형사사건이 법원에서 무죄판결 날 경우, 수사검사의 인사점수에 불이익이 있었기 때문에 검찰로써는 다소 무리수를 쓰더라도 유죄입증을 이끌어 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헌법에 규정된 ‘무죄추정의 원칙’을 근거로 법원의 확정판결이 있기 전까지는 그 누구도 죄인취급을 받아서는 곤란하다. 징벌적 의미의 구속영장이 남발될 경우, 국민 모두가 사법 피해자가 될 수 있을 뿐더러, 만약 무죄판결이 날 경우 그 상처와 고통을 누가 책임지겠는가?
4. 과학수사의 원칙으로 돌아가야
최근 인기 있는 미국 드라마 ‘CSI’를 보면, 수사반장이 철저한 과학수사를 통해 뚜렷한 물증을 찾기 전까지는 피의자를 구속하는 경우는 드물다. 아무리 심증이 확실하고 혐의자가 밉더라도, 철저한 과학수사를 통한 물증확보와 이를 근거로 범행시인을 받기 전까지는 함부러 유무죄 여부를 속단해선 곤란하다.
피의자의 유무죄 여부는 법관이 판단할 문제이기 때문이다. 잘못된 사법관행으로 선량한 국민 단 한명이라도 무고하게 형벌을 받을 경우, 그 사회는 정당한 사회공동체로써의 기능을 이미 상실한 것이다.
대법원을 중심으로 국민의 인권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변화하는 모습은 무척 다행스러운 일이다. 더불어 검찰을 비롯한 사법수사관들도 철저한 과학수사 기법을 이용해 범죄자를 찾아내되, 무죄추정의 대원칙을 훼손하는 일을 해서는 곤란하다.
아무리 추악한 범죄자라도 형사처벌은 별론으로 하고, 인간으로써 그의 인권은 존중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사법선진국으로 가는 길이다.[관리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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