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格)이란 환경과 사정에 잘 어울리는 분수나 품위를 말한다. 따라서 격은 사람이 겪는 ‘곳’에 맞고, 사람이 겪은 ‘때’에 맞는다. 곳은 장소고, 자연이고, 환경이다. 때는 시간이고, 느낌이며, 상태다. 그러므로 격을 갖는다는 것은 나의 바깥과 안이 조화롭다는 것이다. 조화는 계속해서 변하고, 움직인다는 것이다. 움직이지 않으면 조화는 없다. 몸과 마음이 편안하고 그것이 환경과 사회에 맞는 것이 될때에 격은 이루어진다.
이 격은 지금 한국사회가 추구해야 할 아름다운 무늬라고 본다. 다시 말하면 한국의 무늬로서 지금을 만드는 작업인 것이다. 그런데 남북이 지난 12일부터 1박2일 일정으로 서울에서 열기로 했던 당국회담이 11일 막판 조율과정에서 무산됐다. 우리측 수석대표의 격(格)에 대한 북측의 반발 때문이다. 양측은 판문점 연락채널을 통해 이날 저녁까지 대표단 구성문제에 대한 이견을 좁히려 했지만 끝내 타협에 이르지 못했다.
김형석 통일부 대변인은 이날 브리핑에서 “북측이 우리 측 수석대표의 급을 문제삼아 대표단 파견을 보류한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했다”며 “12일 당국회담은 예정대로 열리지 못한다”고 밝혔다.
북측의 국장급 수석대표에 비하면 우리의 차관급도 높은 편인데 격(格)이 맞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장관급으로 바꾸라고 요구한 것은 옹졸하고 오만하다. 북측이 진정 당국회담을 열 의사가 있었는지조차 의심스럽다.
남북은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 모두 21차례의 장관급회담을 가졌지만 수석대표의 격이 달랐다. 남측은 통일부 장관이 수석대표로 나선 반면 북측은 우리로 치면 이사관(2급)이나 부이사관(3급)인 내각 책임참사를 내세웠다.
격이 맞지 않은 회담이었지만 당시 우리 정부는 ‘북한의 특수한 사정을 존중한다’는 이유로 수용했다. 햇볕정책의 성과에 연연한 탓이 컸을 것이다. 이런 비정상과 비상식은 회담 대표의 격(格) 뿐만이 아니었다. 우리는 식량 등 북한에 줄 것은 다 주면서도 정작 비핵화나 장거리 미사일 개발 저지 등 주요 현안에서는 늘 북한에 끌려다녔다. 북한이 이번에 우리 측 수석대표의 격을 문제삼은 것도 이 같은 과거의 전례와 향수 때문일 것이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회담을 앞두고 “격이 맞지 않는다면 시작부터 서로가 신뢰하기 어렵다”면서 “이는 회담에 임하는 기본자세로(남북 간에도) 국제 스탠더드가 적용돼야 한다”고 말했다. 정당한 주장이다. 굴종이나 굴욕을 강요하는 형태는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이다.
무슨 회담이든 내용 못지않게 절차와 형식도 중요하다. 절차와 형식은 신뢰의 기초에 해당하는 까닭이다. 북한이 진정성을 보이지 않는다면 남북이 아무리 회담을 연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북한은 진정 남북 현안들을 해결하고 지금의 교착 상태를 풀려는 생각이 있다면 회담에 임하는 자세부터 바꾸는 게 옳다.
박근혜 정부가 예전의 틀을 그대로 답습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한 이상 북한도 변화된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얽히고 설킨 북한 문제를 해결하려면 세가지 조건이 함께 충족돼야 한다.
첫째는 남북관계의 발전이다. 남북관계는 북한이 발을 멀리 내디딜 수 있는 받침대가 된다. 9.19공동성명 등 과거의 성취들은 그렇게 이뤄졌다.
둘째는 미국의 적극적인 태도다. 미국은 한반도.동북아 지역의 안보 구도에서 최대 주주라고 할 수 있다. 남북 분단에서부터 수십년에 걸친 냉전, 냉전 이후 동맹.대립 관계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미국이 앞에 나서지 않는 한 적대성은 해소되지 않을 것이다.
셋째는 미국과 중국의 대타협이다. 북한 문제의 해결은 그 이후 세력 구도를 어떻게 짜느냐는 문제와 연결돼 있다. 한반도는 과거 미국과 소련이 분할점령하면서 분단됐다. 당시 소련의 자리에 이제 중국이 서 있다.
따라서 미국과 중국이 대립한다면 북한 문제를 풀 동력은 현저히 줄어들 수밖에 없다. 북한의 개혁.개방도 미중 대타협 분위기에서 효과적으로 추진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박근혜 대통령은 중국과 미국에 대한 공조를 강화해야 한다. 이달 27일 한중 정상회담을 앞두고 북한이 유연한 태도를 보일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북한은 지난달 중국에 특사를 보냈지만 냉대를 받았고, 미중 양국이 비핵화를 요구하며 압박수위를 높여 궁지에 몰려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가능하면 모처럼 마련된 남북간 대화의 모멘텀을 살려나가길 촉구한다. 이번 회담은 무산됐지만 남북 당국은 빠른 시일 내에 다시 대화 테이블에 앉아야 한다. 정부 당국은 좀더 평화로운 한반도를 만들겠다는 확고한 신념을 보여줘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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