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제역(口蹄疫)이 최후 방어선인 호남지역을 위협하자 전남지역이 백신 딜레마에 빠졌다는 소식이다. 충격적이다. 그것은 아직 구제역이 발생하지 않았지만 전국적 확산추세를 볼 때 가능성이 높고, 전남유입의 최후 보루인 전북도가 백신을 접종키로 했기 때문이다.
선제적 대응으로 백신접종을 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반면에 지역 농가들을 중심으로 구제역이 발생하지 않았는데도 백신을 접종하면 구제역 감염을 인정하는 모양새가 되므로 청정이미지를 고려해 최대한 버틸 때까지 버텨야 한다는 견해도 강하다.
어쨌든 우리는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해 11월 28일 경북 안동에서 처음 발생한 이래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퍼져나가 피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매몰된 소와 돼지만도 130만마리 이상이 된다. 대량 생매장임으로 2차 오염 또한 구제역 확산에 못지 않은 국가적 재앙을 가져올 우려마저 없지 않다.
구제역이 발생한 이후 지방정부 공무원들은 처절한 상황에 눈물을 삼키며 방역과 매몰에 사투를 벌이고 있다고 한다. 경북 안동에서는 이동통제초소에 근무중이던 직원이 숨지고, 경북 영양에서는 방역직원이 작업차량에 깔려 숨졌다. 어떤 직원은 몸부림치던 돼지와 함께 매몰구덩이에 떨어져 다치는 등의 부상도 있었다.
그 뿐만 아니다. 방역과 매몰에 나선 공무원들이 식욕부진과 우울증에 시달리거나 소 울음소리의 환청과 구덩이에서 탈출하려고 몸부림치는 돼지들이 꿈에 나타나 밤잠을 설치는 등의 고통을 겪기도 했다. 어디 공무원들뿐인가. 자식처럼 애지중지(愛之重之) 키워 온 가축을 생매장한 축산인들은 밤낮없이 울음으로 살고 있다. 정말 축산인들이 가련하다.
구제역의 기세는 살벌하다. 바람처럼 번지는 이 전염병 앞에서 우리 농촌의 소·돼지 130만마리 이상이 살처분됐다. 수은주가 영하 10도 밑으로 떨어지는 혹한도, 대규모 백신도 별 소용이 없다고 본다. 1997년 대만, 2001년 영국도 구제역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다. 그때의 피해액만도 대만이 41조원, 영국이 약 60억파운드(약 10조5000억원) 였다.
구제역이 역사에 처음 등장한 것은 중세인 16세기였다. 이탈리아 북부의 베로나의 한 수도승이 남긴 1514년 기록에 ‘소가 침을 흘리고 수포가 생겼다’는 부분이 나온다. 전형적인 구제역 증상이다.
구제역 바이러스가 과학자에 의해 확인된 것은 1세기가 넘는다. 이런 긴 퇴치 노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제역은 오늘날 최소 6억명에 이르는 전 세계 축산업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존재가 됐다.
하지만 구제역 바이러스는 정작 참으로 하찮은 존재다. 구제역 바이러스는 동물 바이러스 중 가장 크기가 작은 놈 중 하나다. 바이러스 자신의 유전정보를 지닌 RNA 주위를 단백질 띠들이 둘러싸고 있는 구형, 정확히 말하면 20면체로 지름이 1mm의 4만분의 1이다.
이 바이러스는 소나 돼지처럼 두 개의 발굽을 가진 동물의 입이나 발굽 세포에 붙어 자신의 유전 정보를 이식한 후 숙주의 체세포들을 바이러스를 증식시키는 공장으로 탈바꿈시킨다. 스스로는 복제와 증식을 할 수 없어 남의 세포에 빌붙어 생존하는 구제역 바이러스는 기생충의 가장 원초적 형태이기도 하다.
크기는 작지만 구제역 바이러스의 전염력은 바이러스계 최강으로 꼽힌다. 서울대 수의학과 채찬희 교수는 “호흡을 통해 흡입될 경우 단 10마리의 바이러스만 있어도 소나 돼지를 감염시킬 수 있을 정도”라고 말했다. 강한 바이러스임을 알 수 있다. 더구나 바람을 타고 한 번에 250km까지 퍼져 나간 사례도 보고된 적이 있다.
구제역 바이러스는 ‘숙주 시너지’를 가진 바이러스다. 소·돼지·염소·양 등 숙주가 다양하고 이들 동물이 구제역 바이러스를 배양·증폭·전파하는 데 있어서 마치 역할을 분담한 듯한 특성을 보이며 구제역 바이러스의 감염성을 크게 증폭시킨다.
그런데 정작 방역과 매몰을 위해 죽음까지도 불사하는 것이 지방정부의 공무원들이다. 이는 정말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번 사태를 보고서도 중앙정부는 방역에 관한 권한을 계속 쥐고 있을 것인지 묻고 싶다.
초기대응에 적극 나서야 할 중앙정부가 구제역이 발생한 후 한 달 만에야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를 꾸리는 등의 늑장대응으로 구제역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것을 바라보고만 있는 셈이 되었다. 국가적 재난에 정부가 늑장대응을 해서야 쓰겠는가.
하지만 희망은 있다. 사람은 실패에서 교훈을 얻기 때문이다. 정부는 이번 일을 계기로 가축방역에 관한 예산과 장비와 기술을 지방정부에 대폭 이양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가축이 사육되고 있는 현장에서 평상시에 철저한 방역과 예방활동 등이 이루어지는 까닭이다.
정부 당국은 다시는 방역시스템의 불비와 늑장대응으로 가축전염병과 같은 국가적 재앙이 재현되지 않도록 철저한 대책을 수립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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