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10월 22일, 길가 가로수의 잎새마다 고운 단풍이 물들어 가는 시월의 가을 하늘은 회색빛 구름까지도 아름답게 보였다. 조선일보 춘천 마라톤 대회가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규모가 크고 전통있는 대회임을 익히 들어왔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여들 줄은 몰랐다. 남·녀 풀코스 참가자만 5,420명에 10km와 5km대회 참가자를 모두 합하면 약 1만6000명이 넘는다고 했다.
내가 달리기에 재미를 붙여 마라톤을 시작한지는 일년밖에 되지 않았다. 그동안 하프마라톤대회 5회, 풀코스대회 1회에 참가한 일천한 마라톤 경력의 나로서는 오늘 여기에 오기를 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많은 사람이 모인 규모가 큰 대회에서 다른 사람들의 열심히 뛰는 모습을 보면 내 자신도 훈련에 더 열심일 것 같았다.
운동장에 모인 선수들은 마라톤 동호회별로 무리지어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기도 하고 운동장의 트랙을 가볍게 돌면서 준비운동을 하며 출발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도 배번 1166번을 달고 트랙을 도는 선수들의 무리에 자연스럽게 합류해서 가볍게 뛰며 트랙을 두 바퀴 돌아보았다.
처음 풀코스에 도전했던 지난 6월의 제주마라톤대회에서 무릎 통증으로 무지하게 고생했던 기억이 났다. 하프코스는 몇 차례 뛰어 본 적이 있었으나 처음으로 풀코스에 도전을 하였던 그때, 반환점을 지난 뒤부터 왼쪽 무릎 바깥쪽이 따끔거리며 아파왔다. 장거리훈련(LSD)이 부족한 탓이었다. 아픈 다리를 절뚝거리며 뛰고 걷기를 반복하여 4시간 38분만에 결승점을 통과한 쓰라린 경험을 했었다. 그러나 그때의 첫 완주의 기쁨은 무엇과도 바꾸지 않을 만큼 컸다. 달리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그 기쁨의 크기를 느낄 수 없다.
출발 시간 20분 전에 출발 지점으로 갔다. 이미 많은 선수들이 기록을 의식하여 앞쪽에 몰려있기 때문에 앞부분은 들어갈 틈도 없었지만 내 능력을 내가 아는지라 나는 뒤쪽에 가서 섰다.
드디어 출발 신호가 울렸다. 그러나 워낙 많은 사람이 모여서인지 전광판 시계가 1분이 다 되도록 대열의 움직임이 뒤쪽까지 전해지지 않았다. 잠시 후 거대한 파도의 일렁임처럼 내 앞의 선수들이 느리게 밀려나가기 시작하였다. 거대한 사람들의 파도였다.
갑자기 내 옆에서 휴대폰 벨소리가 났다. 젊은 선수가 달리면서 휴대폰을 받으며 하는 말, “나 지금 달리고 있어. 방금 출발했어. 헉헉헉…”. 뒤따르는 다른 선수는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습니다!” 하고는 휴대폰 선수를 추월하였다. 주위에서 달리던 우리 모두는 한바탕 신나게 웃고 나서 또 달렸다.
의암빙상장 입구의 5km지점을 30분만에 통과하였다. 뒷무릎의 통증이 더이상 진행되지 않아 약간 속도를 높였다. 앞에서 달리는 선수들을 계속 추월하면서 달리다보니 어느덧 의암호가 보였다. 코스의 오른쪽에 보이는 의암호를 바라보며 춘천 마라톤의 코스가 아름답다는 말을 실감하였다. 멈춰서서 호수의 아름다움에 빠지고 싶은 생각이 들만큼 호수 속에 잠긴 춘천의 가을 풍경은 매력적이었다. 의암댐에 있는 신연교 주변의 상가에서 나온 상인과 손님들이 손뼉을 치며 응원을 해주어 다시 힘을 내어 달려갔다.
아직까지 힘들지 않고 달릴 수가 있어 계속해서 앞사람을 추월하며 달려나가 10km 지점을 통과하였다. 계측요원으로부터 55분이 지났다는 소리를 들었다. 25분만에 5km 구간을 달렸으니 예상보다 잘 달린 셈이다.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는 듯한 호수의 풍광을 바라보면 숨가쁜 심장의 고동까지도 차분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의암호 코스를 뛰어보지 않고서는 어디에 아름다운 마라톤 코스가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시민들의 열렬한 응원 속에 정신없이 달리다 보니 어느덧 춘천종합운동장의 입구가 보였다. 운동장 입구에서 운동장안 트랙 주변으로는 응원나온 선수들의 가족들로 가득차 있었다. 트랙 주변의 선수 가족들은 달려오는 선수가 내 가족이 아니더라도 힘들게 뛰어오는 모든 선수들에게 완주를 축하하는 뜨거운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운동장 트랙의 부드러운 탄력을 느끼며 전력으로 질주하여 트랙을 돌았다. 멀리 결승점의 전광판 시계는 4시간 8분 31초를 지나고 있었다. 나는 결승점을 향해 마지막 힘을 내어 달렸고 결승점을 통과하는 순간은 전광판을 보지 않았다. 오직 4시간 8분대를 넘기지 않았으리라는 확신만을 가졌다.
나는 이렇게 마라톤 풀코스를 당당히 완주했다. 결승점 근처에서 나누어 준 작은 물병의 물 한 병을 다 마셨다.
기뻤다. 가슴 저 깊은 곳에서 완주했다는 기쁨이 온 몸으로 퍼져나왔다. 나는 정말이지 전 구간을 달리는 동안 급수대에서 음료를 마실 때와 무릎에 약을 바르는 때 외에는 주로상에서 단 한번도 멈춰 쉬거나 걷지를 않았다. 풀코스 마라톤 완주의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역경을 이겨낸 내 자신에 대한 자신감을 확인하는, 정말 가슴 뿌듯한 순간이었다. 나는 먼저 집에서 걱정하고 있을 아내에게 완주 소식을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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