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초등학생이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물었다. “우정과 사랑 중 무엇을 선택해야 합니까?” 1995년 스승의 날을 앞두고 서울의 한 초등학교를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한 남학생이 자기가 좋아하는 여학생을 친구도 좋아한다며 고민을 털어놨다. 김 전 대통령은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끝내 쟁취해야 한다”고 대답했다.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사랑이라는 말에 쟁취라니 얼마나 생뚱맞은가. 초등학생에게 주는 조언이니 더 난감하다. 평생 민주화 투쟁만 해온 경험에서 나온 답변이다. 권력은 싸워서 뺏어야 하는 것이라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권력은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그런 일은 권력자를 신성시하는 신화에나 나오는 얘기다.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이 며칠 전 재경 공주향우회에서 “충청도는 나라 가운데서 중심을 잡아왔다”고 말해 주목을 끌었다. 출마를 결심했다는 얘기가 나오자 그는 “(정치에) 생각이 없는 사람이어서 그런 말을 한 것”이라고 부인했다.
그렇지만 정치권에서는 그의 정치 참여가 어느덧 기정사실이 돼 가고 있다. 그 스스로 “정치를 하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 없다”며 한 발을 들여놓고 있기 때문이다. 정 전 총장이 어정쩡한 태도를 보이는 건 조건을 따지기 때문이라는 말도 나온다.
열린우리당 김근태 의장과 정동영 전 의장은 “당의 정체성을 발전시켜 원칙 있는 국민의 신당으로 거듭 태어나야 한다”고 합의했다.
두 사람은 “평화개혁세력과 미래세력의 대통합을 결의하고 나라의 미래를 걱정하는 각계 각층의 양심 있는 인사들과 함께 준비작업에 나선다”고 밝혔다.
열린우리당 사람들의 포장술은 비상하다. 이들이 4년 전 이 땅의 ‘평화세력’ ‘개혁세력’ ‘민주세력’을 모두 모아 만들었던 당이 바로 열린우리당이다. 자칭 이 땅의 ‘개혁세력’이란 사람들이 모여 만든 열린우리당의 요즘 지지율은 한나라당 지지율의 4분의 1 수준인 10% 안팎이다.
국민 10명 중 9명이 이들을 ‘평화’ ‘민주’ ‘개혁’세력으로 보지 않는다는 뜻이다.
사실 국민들에게 북한의 핵폭탄을 머리에 이고 살게 만들고, 헌법재판소의 수도 이전 위헌 결정을 무슨 복합도시란 말꼬리를 붙여 빠져나가고, 세계의 대세에 역행하는 정책으로 국민을 백수건달 신세로 몰아내고 있는 이들을 누가 ‘평화’ ‘민주’ ‘개혁’세력으로 보겠는가.
열린우리당 사람들은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다시 ‘당의 정체성을 발전시키고’ ‘미래세력들을 덧붙여서’ 새로운 변신술을 선보이겠다는 것이다.
열린우리당과 그 주변 사람들은 지난 4년간 친북 좌파의 깃발을 휘두르면서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짓밟았다. 대한민국 정체성엔 말 한마디 없던 그들이 그 당의 정체성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이렇게 미련을 떨치지 못하는가.
열린우리당은 지난 4년 내내 100년 전 과거사까지 파헤치겠다고 해왔다. 실제 행정부의 각 부처는 물론이고 사법부까지 과거사 캐기 작업으로 몰아 넣었다. 전공 과목이 ‘과거’인 과거 전문 정당인 셈이다. 이 과거 전문 정당이 갑자기 미래 정당으로 신장개업하겠다니 할 말이 없다.
신당은 우선 도덕성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현재의 세력은 대통령 당선을 뒷바라지한 정당(민주당)을 버리고 딴살림을 차렸다.
위자료는커녕 선거 빚만 남겨주고 떠났다. 어쩌다 운 좋게 로또(탄핵 역풍)를 만나 원내 과반수라는 대박을 터뜨렸다.
그러자 자만심에 빠진 나머지 흥청망청 세월과 재산을 써버렸다. 어느새 그 좋아 보이던 살림은 5.31 지방선거 완패가 말해주듯 부도 위기를 맞았다.
그러곤 힘 빠진 대통령을 버리고 이제 다시 새살림을 차리겠다는 것이다. 배호의 ‘영시의 이별’ 노래나 부르고 싶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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