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양대군이 권력을 잡자 대문에 권문세가들이 장사진을 이뤘다. 평소 얕보고 비웃던 사람일수록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어떻게든 눈도장이라도 찍어 잘하면 한자리하고, 못해도 괘씸죄는 면해야겠다는 염량세태다. 이때 ‘문턱이 닳는다’는 말도 생겼다고 한다. 권력을 좇는 부나비들의 알량한 행태는 흥선대원군도 경험했다. 파락호로 다닐 때 업신여기던 이들이 권력을 잡게 되자 문전성시를 이뤘다. 명절에는 바리바리 선물을 싣고 줄을 섰다. 그러나 실권한 뒤에는 다시 발길을 끊었다.
권력을 좇는 해바라기들이야 동서고금 어디서나 기생했다. 그런데 이미 권력을 놓아버린 전임 대통령들 문턱이 닳아 없어질 지경이라고 하니 신기한 일이다. 대통령 후보로 나서겠다는 사람들이 세배하겠다고 줄을 서기 때문이다.
새해에 국가 원로를 찾아뵙고 인사 드리는 것을 나무랄 일은 아니다. 예로부터 묵은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으면서 가족과 조상, 동네 웃어른까지 찾아뵙는 건 기본적 예의였다. 대개 보름까지는 인사를 드리지만 처가에는 ‘미나리꽃 필 무렵(7~8월)’까지 말미를 주며 꼭 챙기라고 하는 게 세배다. 신하는 임금을 찾아뵙고, 임금은 천지일월에 기곡축년의 의미를 담아 절을 했다.
세배를 받은 웃어른은 덕담을 한다. 덕담에는 무엇이 이뤄지기를 바라는 희망을 담았다. ‘말이 씨가 된다’는 속담처럼 덕담은 주문 효과가 있다고 믿었다. 원시시대부터 내려오는 언령신앙이다. 그 때문에 황당하고 허튼 말은 하지 않는 것을 도리로 여겼다. 어린아이라면 덕담보다 세뱃돈에 더 관심이 있을지도 모른다.
지난해까지도 찾지 않던 전임 대통령에게 갑자기 대선 주자들이 몰리는 것도 ‘정치적 세뱃돈’을 노린 세배꾼의 심정일 것이다. 허튼 말이라도 ‘대권을 잡으라’는 덕담이면 좋고, 최소한 ‘열심히 하라’’는 말이라도 얻어 훼방은 놓지 않도록 하겠다는 계산이다. 제일 북적이는 곳은 김대중 전 대통령 집이다. 호남 민심이라는 두둑한 세뱃돈 덕분이라고들 한다. ‘29만원밖에 없다’는 전두환 전 대통령도 예외가 아니다.
신문들의 지면을 장식한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큰 절을 하는 한나라당 원희룡 의원의 사진은 황당함과 당혹스러움을 안겨주기에 충분하다. 대학 재학 시절 광주민주화운동이 자신을 운동권으로 변모시킨 결정적인 이유라고 당당히 밝히던 그다. 한나라당 내에서 개혁의 기수임을 자처하며 민정계 등에 대한 인적청산을 외치던 크가 1980년대 총칼로 민주화세력을 무참히 짓밟았던 전직 대통령을 찾아 큰 절을 올린 것이다. 이를 두고 ‘독재와 민주의 화합 차원’이라는 식으로 둘러대는 것은 마땅치 않을 뿐더러 민주와 역사에 대한 모독이다.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 김대중 전 대통령을 찾아 호남을 얘기하고,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를 찾아 현정부의 북한에 대한 퍼주기를 문제 삼는 태도에서 미풍양속과 예의를 말하는 것은 어색하기만 하다. 과거에는 한 차례도 새해 인사 방문을 하지 않던 이전시장이 올해 유독 전직 대통령을 찾는 것은 그분들의 영향력 뒤에 자리한 특정 지역의 표를 겨냥한 것이다.
전직 대통령은 전직 대통령으로서 적합한 예우가 필요하고, 그분들이 갖고 있는 경륜과 국정 경험이 후학들에게 교훈이 되고 자산이 되는 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전직 대통령들이 특히나 지역정서에 기대서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려는 것은 나라에도, 국민에게도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죽했으면 한나라당 홍준표 의원마저 “도가 넘치는 코미디”라고 일갈했을까 싶다. 국가와 민심을 말하기에 앞서 ‘세배정치’ 같은 쇼나 이벤트 정치로 구태의연한 생각부터 버리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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