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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색의 계절에 서서 |
2008년11월19일(Wed) |
| 김용하<논설위원·광주고등학교장·수필가> |
어느새 두달씩 찍힌 달력이 마지막 장이다. 태어나서 수십년 세월이 흐르고 나이만큼 겪은 일이지만, 오늘 더욱 가슴 한 켠이 휑하게 느껴지는 것은 또 무슨 까닭일까?
따지고 보면 어제와 오늘이 단절된 바가 없고, 가는 해니 새해니 하는 것은 한낱 인간들이 자기 나름대로 구분지어 놓은 것에 불과하다.
연속되고 있는 자연의 운행질서는 무한으로 계속되고 있을 뿐인데도 우리들은 날과 달이 가고, 해가 바뀌는 것에 대하여 단락을 지우고, 큰 의미를 부여하곤 한다. 이렇게 그림자가 길어져 내린 이때쯤이면 우리는 하릴없이 자신과 대화의 시간이 길어진다.
나는 과연 누구인가? 나를 여기 데려오고 또 데려 가는 자는? 종교적으로도 다르고, 동서양의 판단이 다르기도 하다. 그러나 삶의 주체인 나 자신의 선택이라는 것은 도무지 없었던 것 같다. 내가 나 자신의 존재를 선택하지도 못했고, 나를 낳아주신 부모조차도 나를 선택한 바 없다.
어떤 철학자는 인간을 피투성적 존재이면서 기투성적 존재라고 갈파하였다. 어느 순간 이 시공속에 갑자기 내던져진 존재로서 전혀 우연의 산물일 뿐이다. 우리는 어떠한 기약이나 보장도 받은바 없는 존재이다. 그러나 운명적으로 우연히 내던져진 존재이지만, 자기의 삶의 일정부분을 스스로 만들어 갈 수밖에 없는 기투성적인 것이다.
어찌보면 모든 것이 운명과 팔자소관인 것 같지만 그렇다고 모든 것을 운명에만 맡기고 노력없이 살아갈 수는 없지 않은가? 여기에 우리 인간의 근본적인 고민이 생기는 것 아닌가 한다. 철학도 바로 인간의 자기탐구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칸트도 철학의 영역에 대해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라는 형이상학적 질문에서 시작하여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도덕적 사고와 “무엇을 바라는가?”에 대한 종교적 질문, 끝으로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 바 있다. 그 심오한 철학적 명제들에 대해 깊이 아는 바 없지만 나는 오히려 네 번째 질문이 가장 앞서야 한다고 생각해본다.
‘인간이란 무엇인가?’가 모든 것의 근원이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인간의 가장 큰 명제는 살아있다는 것 즉 생명과 직결되지 않는가? 인간은 살아가기 위해 분주하고, 싸우고, 때로는 고독하고 절망한다.
또한 삶은 끊임없는 조망이다. 오솔 길을 걷다가 만난 작은 들꽃의 강인한 생명력을 보고 감탄한다. 바위에 수백년 용틀임한 키 작은 나무를 보면서 그 지지리도 박복한 고통의 삶을 보면서, 동정하고 하필이면 그런 곳에 태어날 수 밖에 없는 가혹함에 전율한다.
때로는 사소한 것에 행복을 느끼기도 한다. 적어도 동토의 땅에서나 물이 없어 말라죽어간다는 아프리카의 어느 땅에서 태어나지 않았음에 감사한다.
자기운명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 어떠한 운명이던지 긍정하고 초월해가야 한다. 자기 자신에 대한 애정을 갖지 못하거나 내가 나를 고귀하고 존엄한 존재로 믿지 않는 한 남의 인격도 존중할 수 없다. 자신의 조건을 잘 살려서 운명을 개척해보려는 부단한 노력이 있어야 한다.
무엇을 이루었느냐하는 것보다 자기 삶의 과정을 어떻게 살아가느냐의 문제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묵묵히 성실하게 사는 삶이야말로 우연을 필연으로 만드는 성공적인 삶이 아닐까?
삶의 방향과 보람을 느끼지 못한다면 이것은 삶의 자기부정이요, 주체성의 포기요, 자기소외일 뿐이다. 그러나 자신의 내적인 문제가 아니고, 외적인 것으로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사회적 소외, 박탈, 불평등은 참기 어려울 것이다.
지금 세계의 경제가 휘청거리고 있다. 하필 이럴 때 졸업을 맞는 우리 젊은이들이 삶의 절대조건이 될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여, 방황하고 있다는 우울한 소식이다. 그 어떤 인간의 철학과 사색에서 오는 원초적인 고뇌보다도 눈앞에 닥친 생존의 문제가 심각하다면, 우리가 맞는 이 계절은 더 절망적일 수밖에 없다.[관리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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