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밥을 자주 먹는 것은 건강에 해롭다. 영양학적으로 나무뿌리와 나물이 쌀보다 비타민이 풍부하다. 풀뿌리로 연명했던 조선인 조상들은 후세보다 훨씬 건강하고 튼튼했다.” 1944년 ‘조선상공신문’에 실린 기사다. 일제의 쌀 수탈로 식량난이 극에 달하자 일본 총독부는 조선 민중의 쌀 소비를 억제하기 위해 쌀밥을 많이 먹으면 머리가 나빠지고 건강을 헤친다는 ‘쌀밥 유해설’까지 지어내 언론에 퍼뜨렸다(김환표 ‘쌀밥 전쟁’).
해방 후에도 쌀 부족은 여전했다. 한 해 걸러 반복되는 흉작에 6·25전쟁 탓이 컸지만 쌀 매점매석과 밀수출이 기승을 부리면서 ‘풍년 기근’도 많았다. 이승만 정부는 1950년 쌀 파동을 계기로 쌀의 자유거래를 금하고 밀수출범을 사형시키는 양곡매입법을 만들어 식량을 통제했다. 50년대 중반부터는 대대적 절미운동을 벌였다. 쌀로 엿과 떡·술을 만들어 팔지 말고 음식점·여관 등은 밥에 30% 이상 잡곡을 섞도록 의무화했다.
한국인이 지긋지긋한 보릿고개의 고통에서 겨우 벗어난 건 1976년 통일벼가 개발되면서였다. 박정희 정부는 쌀 자급을 자축해 주 이틀의 무미일(분식일)을 폐지하고 14년 만에 쌀막걸리 제조 금지를 풀었다. 서울 주점가엔 ‘기쁘다 쌀막걸리 나왔네, 만백성 맞으라’는 현수막이 걸렸다. 쌀막걸리의 재등장은 그해 10대 뉴스에 포함됐다.
인천의 쌀국수 생산공장을 찾은 이명박 대통령이 줄어드는 쌀 소비를 늘리기 위해 쌀막걸리·쌀라면·쌀건빵 등 쌀 가공식품 제조를 늘리라고 지시했다.
농식품부도 가공용 쌀 가격을 30% 낮춰 공급하겠다고 했다. 1인당 한 해 쌀 소비량은 95년 106.5㎏에서 지난해 75.8㎏으로 줄었지만 생산량은 460만~480만t 선에서 내려가질 않고 있다. 쌀시장 개방을 미루는 대가로 매년 30만~40만t씩 외국 쌀까지 쏟아져 들어온다. 창고에 쌓인 재고 쌀 69만t을 보관하는 데만 한 해 2000억원을 쓴다.
쌀이 부족하던 시절 어머니들은 밥솥 맨 밑에 물에 불린 통보리와 감자를 깔고 그 위에 흰 쌀을 얹은 '삼층밥'을 지었다. 어머니는 가족들에게 맨 위 쌀밥부터 퍼주고는 당신 그릇엔 보리밥과 감자를 담으면서 늘 “난 쌀밥 싫어한다”고 거짓말을 했다. 자식들에게 흰 쌀밥을 한 술이라도 더 먹이려던 어머니들 모습이 선한데 어느덧 쌀 많이 소비하는 게 미덕인 세상이 됐다.
한국은 2004년 우루과이라운드(UR) 쌀 협상에서 이른바 ‘최소시장접근(MMA) 물량 의무수입’에 합의했다. 적절한 수준의 관세를 물리면서 시장 수급상황에 따라 쌀 수입을 전면 자유화하는 관세화 조치를 2014년까지 유예하는 대신 매년 5%의 낮은 관세로 일정 물량 이상을 의무적으로 수입하는 내용이었다. 장기적인 과제는 쌀에 치중한 농업구조를 단계적으로 바꾸는 것이다. 지금 헌법에 ‘경자유전’을 못 박고 있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
일본의 경우 기업들이 대규모 영농을 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농지법 개정이 한창이다. 이를테면 일본 청주인 ‘사케’ 회사가 일반 벼보다 알갱이가 두 배 큰 사케용 벼를 따로 재배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미 토마토 주스로 유명한 가고메 식품이나 마요네즈로 이름난 큐피는 직접 토마토와 야채를 재배하고 있다. 이제 우리도 농지의 ‘소유’와 ‘이용’을 분리하는 방안을 신중히 검토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쌀 중심의 농업구조를 바꾸고 온실 속에 갇혔던 농업에 새 바람을 불어넣을 수 있다. 요즘 일본은 농업의 재발견에 재미를 붙였다. 농업이야말로 제조업·서비스업까지 아우르는 ‘제6차 산업’이라는 신조어까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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