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의 딸을 외교통상부가 특별채용하면서 응시 자격 변경, 자의적인 시험위원 선정, 점수 몰아주기 등 갖가지 특혜를 준 사실이 6일 행정안전부 감사에서 확인됐다.
그런 줄도 모르고 열심히 서류를 만들어 제출하고 면접시험을 치른 다른 지원자들은 모두 장관 딸을 위한 들러리였던 셈이다.
충격적이다. 행안부의 6일 감사결과 발표에 따르면 면접위원 다섯 중 외부위원 세 명은 다른 응시생에게 더 높은 점수를 줬지만 면접에 참여한 외교부 간부 두 명이 유 장관 딸에게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몰아줘 합격시킨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은 6일 이명박 대통령에게 사표를 제출했다. 청와대 관계자는 “사표를 반려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유 장관을 사퇴시키기로 한 것이다. 당연한 조치다. 들끓는 국민 여론을 더는 외면할 수 없었던 까닭이다.
이명박 정부 출범과 함께 입각해 최장수 장관이 된 유 장관은 이번 파문으로 2년7개월 만에 중도 하차하면서 37년 외교관 경력에 치명적 오점을 남겼다. 유 장관의 낙마는 개인의 불명예를 넘어 외교부 전체의 치욕이다. 수장의 추락을 계기로 외교부는 부끄러운 자화상을 돌아보고, 조직의 면모를 일신해 우리나라 외교가 거듭나는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다.
유 장관은 본연의 업무 때문이 아니라, 자녀 특채 논란으로 자리에서 물러났다. 유 장관의 임기는 오는 11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때까지로 사실상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당장 두 달 후 서울에서 열릴 G20 정상회의 참가국들에는 뭐라 설명할 것인가. 우리 사회가 아직 이 수준밖에 안 되나 싶은 자괴감에 고개를 들지 못하겠다는 국민이 많다.
이를 음서제도(蔭敍制度)로 본다. 음서제도란 조상의 덕에 관직에 오르는 것을 말한다. 음서제도는 예나 오늘이나 그리 떳떳한 일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조선 세조 때에 영의정을 지낸 황수신은 젊은 시절 과거시험을 치르는 도중 시험관한테서 학문이 형편없었다는 말을 듣고 분개해 붓을 던지고 나와버렸다. 후에 아버지의 후광을 입고 음서(蔭敍)로 관직에 나가 영의정까지 올랐지만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것을 평생 탄식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문관들이 모여 술을 마시는 문주회라는 모임이 있었다. “큰 술잔에 술을 가득히 따라 권하며 상대방을 ‘선생’이라 호칭했는데 과거에 합격하지 못한 사람은 선생이라 부르지 않고 ‘대인’이라 불렀다.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사람은 이런 모임을 피했으니 이는 대인이란 소리를 듣기 싫어함이었다”고 <필원잡기>는 적고 있다. 음서 출신자들은 또 사헌부·사간원·홍문관 등 이른바 ‘청요직(淸要職)’에는 기용되지 않았다. 영조가 예순여섯에 열다섯 살의 정순왕후와 혼인한 후 오빠 김귀주를 음서 출신인데도 사간원 정원에 임명한 것을 두고 “어린 아내에게 빠져 판단이 흐려졌다”는 비판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철저한 문벌귀족사회인 고려에 비하면 그나마 조선시대에는 음서제도가 약화됐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오십보백보(五十步 百步)가 아닐까 싶다. 집안을 보고 벼슬을 주는 제도를 둔 것부터가 그렇다.
그렇다면 과거제는 어땠는가. 조선시대 500년 동안 문과에 합격한 1만5000명을 분석해 보니 하위 560개 씨족이 배출한 급제자는 10%뿐이고, 상위 30개 씨족이 전체 급제자의 50%를 차지했다고 한다.
과거 역시 기존 지배층의 사회진출을 추인하는 수단이 돼버린 것이다. 새삼 우리가 이런 민족이었던가를 생각케 한다. 유명환 장관 딸 특채는 ‘현대판 음서제도’가 아닐 수 없다. 이를 계기로 ‘공정한 사회’ 논란이 불붙고 있다. 현재 외무부에서 근무중인 외교관 자녀 7명의 채용 과정에 대해서도 감사팀이 살펴보기로 한 만큼 이 역시 철저히 흑백을 가려야 한다. 그것이 역(逆)차별 논란을 잠재우고, 억울한 피해를 막는 길이기도 하다.
홍정욱(한나라당) 의원이 외교부로부터 제출받은 국감 자료에 따르면 1997년부터 2003년까지 시행됐던 외무고시 2부 시험을 통해 선발된 22명 중 9명(41%)이 외교부 고위직 자녀였다. 이들에 대해서도 국민은 의혹의 눈길을 보내고 있다.
외국어 특기와 외국 생활 경험에서 외교관 자녀들이 유리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인정하더라도 너무 비율이 높지 않으냐는 것이다.
더구나 2012년을 끝으로 외무고시가 폐지되고, 2013년부터는 외교아카데미를 통해 외교 전문인력을 선발하게 돼 있다. 이 또한 외교관 자녀에게 유리할 개연성이 크다. 따라서 선발 절차의 투명성과 공정성 확보가 관건임을 명심해야 한다.
고위직 외교관 자녀가 합격자의 절반에 가까웠다. 어떤 식으로든 특혜가 있어선 안 된다. 정부 당국은 공직자 선발의 공정성과 투명성을 높일 수 있도록 더 엄정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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