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때 의주에서 휴정을 불러 부처의 힘으로 나라를 구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어. 휴정이 말하기를, 늙고 병든 승려는 절에 남아 부처님께 나라를 구하기를 빌도록 하고, 다른 모든 승려는 싸움터로 부르겠다고 했지”. 박덕규의 역사소설 ‘사명대사 일본탐정기’에서 임금이 서산대사 휴정에게 도움을 청했던 날을 회상한 장면이다. 서산대사는 사명대사를 비롯한 승병으로 의승군을 만들어 왜군에 맞섰다.
우리 호국불교는 삼국시대부터 있었다. 고구려 승려 3만명은 당나라 군대에 맞섰다. 신라 문무왕은 평소 “죽은 뒤 호국의 대룡이 돼 불법을 숭봉하고 나라를 수호하고 싶다”며 호국신앙을 강조했다. 고려 태조 왕건은 “우리 국가의 힘은 반드시 제불호위의 힘에 의존한다”며 불교를 국방의 기둥으로 여겼다. 팔만대장경은 호국신앙이 빚어낸 큰 문화재산이다.
불교는 살생을 금하는 종교다. 그러나 불교 경전 중에 ‘인왕반야경’은 호국 불교의 가르침을 담고 있다. 석가모니는 인도의 열여섯 임금들과 문답을 나누면서 “국가를 정당하게 지켜야 불교의 가르침을 따를 수 있다”고 했다. 신라와 고려는 이 경전에 따라 나라가 위기를 맞을 때 반야경을 읽는 법회를 열었다.
천안함이 폭침당한 직후 89세 김용철씨는 “인생은 유한하지만 국가는 무한하다”며 평생 모은 재산 90억원을 방위성금으로 냈다. 북한의 무자비한 공격을 보며 김씨는 “나라가 있어야 개인도 있다”는 상식을 뼈저리게 깨달았다고 했다. 북한이 천안함에 이어 연평도 마을에까지 포탄을 퍼붓는 것이 우리가 마주한 현실이다. 비구니 스님을 비롯해 누구든 국가라는 방패를 어떻게 하면 더 튼튼히 할 수 있는지 생각하게 된다. 한마음 된 국민이야말로 그 어떤 창도 뚫을 수 없는 방패가 된다.
“바닷물에 대충 씻어 밥을 했지만 그릇이 없으니 한 그릇 물도 못 얻어먹어 밤낮으로 남한산성을 바라보며 통곡하고 싶구나.” 병자호란 때 남평 조씨라는 여인이 쓴 숭정병자일기의 한 대목이다. 조씨는 임금과 중신들이 남한산성에 갇혀 있을 때 서해 무인도로 피란을 갔다. 대나무를 베어다 움막을 짓고 바닷물로 쌀을 씻어 끼니를 때우면서 전쟁이 끝날 날만 기다렸다.
문학평론가 유종호는 1951년 1·4후퇴 때 열일곱 살이었다. 그는 충주에서 청주로 피란을 갔다. 피란민들은 마을이 나타날 때마다 하룻밤 재워 달라고 했다. 여기저기서 모인 피란민들이 좁은 방에서 지내다 보니 전염병이 돌기 일쑤였다. 그러다 보니 ‘이 마을엔 돌림병이 들었습니다. 피란민 사절’이라고 쓴 종이를 내붙인 마을도 있었다.
노재봉 전 총리도 6·25 때 피란길에 올랐다. “수원 근방을 내려가는데 삐라가 날아왔다. ‘피란민은 흰옷을 입으라’고 적혀 있었다.” 그때 그는 흰 옥양목을 입고 있었기에 화를 면했다. 함께 길을 걷던 대학생은 카키색 옷을 입고 있었다. 무스탕 전투기가 대학생을 피란민 틈에 섞인 적군으로 잘못 알고 총알을 뿌려댔다고 한다.
황해도가 고향인 송해는 6·25 때 연평도로 피란을 갔다가 유엔군 상륙함(LST)을 타고 부산항에 도착했다. 그는 배에서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막막한 심정이었다고 했다. 그는 원래 이름 ‘복희’ 대신 바다 해 자로 예명을 지었다. 원산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던 소설가 최인훈은 흥남 철수 때 LST를 타고 월남했다. 대표작 ‘광장’의 주인공은 남과 북이 아닌 제3국을 선택한다. 평론가들은 어딘가로 도피하려는 최인훈의 ‘피란민 의식’이 작용한 것이라고 풀이한다.
북한이 포탄을 연평도에 퍼붓자 공포에 질린 주민들이 배를 타고 인천으로 피했다. 6·25 이후 처음으로 목숨을 건 피란 행렬이었다. 한 주민은 “집 바로 앞에서 포탄이 터졌다”며 부들부들 떨었다.
불과 60년 전에 이어졌던 고달픈 피란길을 잊어버린 듯한 것이 우리 안보의식이었다. 역사를 기억하지 못하는 자는 그 역사를 다시 살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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