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코 델타 아시아(BDA) 문제로 베이징 6자 회담이 어처구니없이 정회된 후에 미국 관리들은 이 문제가 곧 해결될 것이며 일정이 다소 지연됐지만 북한은 예정대로 4월 13일까지 핵 시설을 동결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최소한 이 단계까지는 그렇게 될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하지만 지난달 베이징에서 발생한 사건의 전말을 살펴보면 북핵 전면 폐기라는 궁극적 목표에 대해서는 결코 낙관적인 전망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미(美) 재무부가 동결 자금 전면 해제에는 동의했지만 미국 은행들이 BDA와 거래하는 것을 금기시켰기 때문이다.
이는 BDA의 폐쇄를 초래하는 조치인 것이다. 이는 또 북한의 국제 금융거래가 앞으로 사실상 불가능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BDA 동결 자금 2500만 달러를 전부 돌려받지 않으면 회담에 참석도 않겠다고 한 북한이, 미국이 북한의 국제금융거래를 사실상 불가능하게 한 상황에서 과연 본격적인 핵폐기에 나설 리(理)가 있을까?
그런데 한반도 주변, 동북아 정치 지각판(地殼板)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난 반세기 동안 이 지역에 긴장 속의 안정을 유지해 준 지각구조의 지각판이 새로운 위치를 찾아 자리이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 중심의 남방 3각동맹 대(對) 소련 중심의 북방 3각동맹은 1989 ~91년 무너진 사회주의체제와 운명을 같이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북아가 냉전체제를 완전히 해체하지 못한 것은 한반도의 분단상황이다. 북핵(北核)이라는 첨예한 위기가 이 지역의 새로운 질서를 예고하는 지각변동의 원인을 제공한 것이다. 정말 역사적인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일본의 지각판이 가장 활발하고 체계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일본은 최근 호주(濠洲)와 준동맹의 성격을 띤 안보공동선언에 서명, 안보의 외연을 대폭 확장했다.
일본은 호주와의 준동맹을 미국·일본·호주·인도 4개국을 묶는 안보체제로 확대할 속셈을 드러냈다. 일본은 단기적으로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 장기적으로 중국의 군사대국 부상을 염두에 두고 미국과 동맹관계 강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중국의 지각판은 2개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중국·러시아 관계의 확대 강화와 일본과의 관계개선이 그것이다.
중국과 러시아는 아프가니스탄 전쟁 때 미국이 중국의 뒷마당이고 러시아의 앞마당인 중앙아시아의 키르기스스탄과 우즈베키스탄에 군사기지를 확보한 데 대한 공동대응으로 본격적인 안보협력체제를 갖추기 시작한 것이다.
두 나라는 오랜 국경분쟁을 해결하고, 동해와 서해에서 합동군사훈련을 하고, 후진타오 주석과 푸틴 대통령은 1년에 두세 차례씩 만나 중요한 문제들을 직접 논의하고 있다.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로 악화됐던 중·일 관계는 급속히 복원됐다.
한국의 관심사는 북한과 미국의 지각판의 상호접근이다. 북한에 대한 부시 대통령의 태도는 180도 변했다. 북한과는 양자대화를 안 한다던 미국이 베를린에서 북한을 만난 결과는 바로 베이징 6자회담의 2·13합의로 이어진 것이다. 이 합의에 따라 뉴욕에서 열린 북·미 실무회담에서는 연락사무소 설치 같은 중간단계를 건너뛰어 바로 수교로 가자는 설(說)이 나왔다. 6자회담의 주도권이 북한과 미국으로 넘어갔다.
그러면 우리 한국의 대북창구는 어떠한 것인가? 노무현 대통령의 측근인 안희정씨의 대북(對北) 비밀접촉이 고작 전부다. 안 씨가 북과 접촉한 것은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특사파견 문제였다.
안 씨는 이 정권 출범 직후 “집권당 사무총장이 되고 싶다”는 포부를 밝힌 적이 있다. 하지만 2003년 불법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로 실형을 받았다가 지난해 사면 복권된 후 어떤 공직도 갖고 있지 않다.
한마디로 안 씨는 아무 권한도 책임도 없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에게 나라의 미래를 바꿔 놓을지도 모를 남북정상회담의 길 닦기를 맡긴 셈이다.
북이 노 대통령의 의중을 잘 아는 안 씨를 원해서였다고 하지만 그것은 국민에게 국정을 보고할 필요가 없는 김정일 독재체제의 방식일 수밖에 없다.
북한이 지금 국제사회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취하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한국의 지각판이 어디로 움직이는지 알 수 없는 까닭이다.
정부는 하루 속히 당근과 채찍의 적절한 배합을 일관되게 구사해야 한다. 지금 여권 정치인들이 “남북정상회담 하자”는 소리만 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정부는 북한에 대한 ‘막후 대화채널 구축’ 같은 전략적 판단을 하지 못한 것이 아닌지 십분 반성해야 한다. 오늘의 북한이 핵을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으로 전망되는 까닭이다.
우리는 비선(秘線)을 통해 남북정상회담을 해서는 안 된다. 이런 방식으로 정상회담에 매달리면 북한은 우리를 더욱 업신여긴다. 그럴수록 북한은 큰소리치며 우리를 얕본다.
정부 당국은 반드시 효과적인 외교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분명한 목표와 정교한 전략을 세워 투명성을 보이면서 남북관계를 당당히 끌고 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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