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들의 대국에서는 엄격히 금지돼 있지만 아마추어들의 바둑·장기에서는 역시 훈수가 있어야 재미가 배가된다. 갑과 을이 바둑을 두고 있다. 이미
필승지국의 형세를 굳힌 갑이 “바둑두는 사람 어디갔나”라고 큰소리치며 을에게 항서를 쓰라고 채근한다. 이 때 구경꾼의 한사람인 병이 “여차저차 두면 되겠구먼”이라고 훈수한다. 판세는 돌연 역전돼 이번에는 을이 휘파람을 불고 갑의 얼굴이 붉으락 푸르락해진다. 갑의 성격이 다혈질일 경우 병과 멱살잡이를 할 수도 있겠다.
뺨을 맞아가면서도 하는 게 훈수라고 한다. 이처럼 훈수가 매력적인 까닭은 그것을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새삼 확인하고 우월한 기량을 과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수인 선수가 충실히 자신의 가르침에 따라 큰 성과를 거둘 때 상수 훈수꾼의 뿌듯한 성취감은 어디에다 비길 것인가. 때로는 훈수하는 사람이 반드시 상수일 필요도 없다. 대국자가 승부 그 자체에 함몰돼 작은 수밖에 볼 수 없는 반면, 한 발 떨어져 있는 훈수꾼은 큰 그림을 조망할 수 있는 것이다.
정치권에 ‘훈수 정치’ 논란이 빚어지고 있다. 이른바 범여권의 대선주자들이 자신의 서울 동교동 자택에 찾아올 때마다 범여권의 통합과 단일후보를 주문하는 등 정치적 메시지를 던져온 DJ(김대중 전 대통령)가 ‘훈수’의 수위를 점차 높여가고 있다는 것이다.
DJ는 정동영 전 열린우리당의장을 만난 자리에서는 “사생결단의 각오로 단일정당을 만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동안 DJ에 대해 비판을 자제해오던 한나라당도 이번만은 “태상왕정치”라는 등 공세를 퍼부었다.
요즘 범여권을 보면 한심하기 짝이 없다. 제대로 명분을 세운 사람도 없고, 현실적인 정치력이라도 발휘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그저 눈앞의 작은 이익을 위해 어지럽게 몰려다닐 뿐이다. 4년 전 비난하며 헤어진 DJ를 문턱이 닳게 찾아다닌다. 그때 내걸었던 지역주의의 청산이란 명분은 어디에 버렸는가.
그 덕분에 DJ는 여권 최고의 실력자로 복귀했다. 여권에서 다음 대통령 후보가 되겠다는 사람 치고 DJ에게 조아리지 않는 이가 없다. 손학규 전 경기, 김혁규 전 경남지사와 정동영 전 의장, 김한길 중도개혁통합신당 대표에 이어 박상천 민주당 대표도 만났다. DJ의 발언도 점점 더 노골적이다. 올 들어 “양당 체제가 바람직하다” “최소한 후보 단일화를 해야 한다”고 주문하더니 4월에는 "정 안 되면 후보 연합이라도 해야 한다"고 구체적인 방법까지 지시했다.
DJ가 정치활동을 하는 데 법적인 제약은 없다. 하지만 전직 대통령의 정치활동을 금기로 여겨온 것이 한국 정치의 전통이다. 그 폐해를 굳이 열거할 필요도 없이 DJ 스스로 지난해 10월 "정치에 일절 관여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던가. 심지어 정 전 의장을 만나서도 “은퇴한 대통령으로서 말하는 것은 나라를 위해 좋지 않다. 나같이 물러난 사람은 분수를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콩이야 팥이야 일일이 간섭하는 것은 권력에 대한 미련이요, 욕심이다.
적대적 투쟁을 부추기는 것은 적어도 국가 원로가 주문할 말이 아니다. 더 큰 문제는 새로운 시대에 맞는 인물이 되려고 스스로 노력하지 않고, 지역주의에 기반을 둔 전직 대통령의 등에 업혀 대통령이 돼 보겠다는 사람들의 행태다. 국정 실패로 국민에게 버림받은 여권이 위장 신장개업을 하려고 해도 내놓을 상품이라는 것이 결국 낡은 지역주의밖엔 남지 않았다는 얘기이기도하다. 전직 대통령의 훈수없이 스스로 일어서고, 상황을 돌파해나가는 정치적 자생력을 보여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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